처음에 편집부에서 피아노를 잘 울릴 수 있는 시스템을 구성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마
치 영화의 플래시백 같은 기법으로 먼 옛날의 환영 하나가 불쑥 솟구쳐서 감미롭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음악의 시작과 환상 같은 것은 바로 피아노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작은 찻길 건너편에는 일정 때 건립된 사범학교 관사 동네가 있었다. 그 중 한 집에 당시로서는 함부로 소유할 수 없었던 피아노가 있었고 밤마다 누군가의 피아노 연습 소리가 흘러나왔다. 분홍빛의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서 밤이 되면 어김 없이 들려오던 곡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쇼팽의 폴로네이즈 제6번 '영웅'이었다. 또 가끔은 '소녀의 기도'도 들려왔는데, 그 방에서 과연 누가 피아노를 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점점 환상이 피어올랐다. '얼굴이 하얗고 까만 눈의 아름다운 소녀가 피아노 앞에 앉아있겠지...'
밤만 되면 창가에서 그 집을 건너다 보느라고 가슴이 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주인공을 드디어 발견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한 소녀가 그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 애가 피아노를 쳤던 것으로 믿고 희미한 동경과 그리움의 열병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달빛이 밝거나 비가 오는 밤, 그 집의 창가를 건너다보며 침묵속에서 몽환으로 가슴 설레던 시절.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은 홀연히 이사를 가버리고 말았다. 달은 빛나건만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는 그 창은 너무나도 어둡고 황량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유령의 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도 분홍빛 커튼속에서 들려오던 그 피아노 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영웅'과 '소녀의 기도'를 잊을 수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음악은 그리움과 동일한 영역'이란 표현에 그래서 동감한다. 그 소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사를 가버린 다음에야, 그 집에는 어느 여고음악 교사가 살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교사가 피아노의 주인공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어쨌든 그 피아노와 환상 속의 소녀는 아직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도 나에게 모든 피아노 음악은 '영웅'과 '소녀의 기도'로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시스템 구성으로 고심하자 편집부에서는, 꼭 피아노가 아니더라도 권장하고 싶은 시스템을 추천해달라는 주문으로 바뀌었지만, 오디오 기기에서 피아노 재현만큼 어려운 장르는 사실 없다. 다른 장르라고 해서 호락호락할 리는 없지만, 피아노는 우선 탄탄한 힘과 해상력, 저역 장악력, 선명도와 자연스러움이 함께 어울려야만 제대로 들을 수 있다. 그래서 피아노가 잘 들린다면 다른 장르는 자연스럽게 해결되고도 남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기로 음역이 낮고 느린 소품, 예를 들어 슈만의 '트로메라이'나 쇼팽의 연습곡 제3번 '이별의 노래'와 같은 작품을 들으면 실망스럽다. 이런 곡을 아주 생연주에 가깝게 들려 주었던 기억으로는 MBL의 1억이 넘는 시스템이었다. 어지간한 시스템으로는 조지 윈스턴의 '오텀'도 잘 재생이 안 된다. 제1악장의 2번째 소절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김빠진 소리가 들려 나오기 십상인 것이다.
거기 비하면 위에 추천한 세트는 그 10분의 1 가격인데 피아노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에도 아주 적합하기 때문에 이 정도면 불황의 시대에 비교적 마음 편하게 추천을 할 수 있을 듯싶다.
스피커는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다인오디오의 최신 시리즈인 콘투어 S 시리즈의 위로부터 두번째 모델인데, 2웨이 3스피커 제품으로 다인오디오 제품답게 아담한 톨보이 모델이면서도 종전의 콘투어 시리즈보다 진일보한 섬세함을 들려준다. 이보다 윗모델인 S5.4로 대금 산조를 들으면서 소름끼칠 만큼 가슴을 휘감는 침투력을 느낀적이 있는데, 그것은 해상력과 함께 자연스러운 음장감 때문일 것이다. 다인오디오의 제품들은 어떤 앰프와 물리느냐에 따라 너무 차고 섬세하다는 주장도 있는데, 객관적으로 다인오디오는 결코 차가운 음색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고 소프트한 면이 강하다. 차갑다라는 주장은 아마 스피커의 감도가 낮은 편인 만큼, 통상적으로 대출력의 좀 차가운 하이엔드 앰프와 매칭시켜왔던 탓이 아닌가 짐작된다.
콘투어 S3.4는 윗모델과 마찬가지로 베이스 리플렉스형인데, 강력한 우퍼의 네오디뮴 마그넷 탓인지 감도가 88dB로 그렇게 높지 않으면서도 의외로 15W 정도의 소출력 진공관 앰프와도 매칭이 잘 된다. 이는 자사의 유닛들이 대부분 감도 86dB 이하였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35Hz까지의 저역을 커버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베이스의 깊은 저 역은 보통 방에서는 나무랄 데 없을 만큼 대량이다. 대편성 곡에서의 해상력과 생기, 매력은 왜 다인오디오가 명가(名家)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뮤지컬 피델리티는 과거 1970년대의 A-1 인티앰프가 보여주었던 영광 이후 약간 퇴조한 느낌을 주었지만, 근래에 다시 당시의 명예를 되살리려는듯 상당한 제품을 연이어 선보이고 있다. 이 메이커의 특징 중 하나는 고맙게도 고가의 제품 대신 중간 가격대나 중저가의 가격 정책을 그대로 유지해오면서, 그 안에서 최상의 소리를 뽑으려는 기업 정신을 들 수 있다.
포노단까지(그것도 MC까지 포함한) 겸비한 A3O8 프리앰프를 보면 굉장히 고가의 고급모델로 보이지만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는 판매가와 꽉 들어찬 실속으로 보는 이를 또 한번 놀라게 한다. 명가가 아니면 함부로 제작하지 않는 듀얼 모노릴 방식으로 전원부를 설계했고, 거대한 볼륨 노브로 상징되는 전체의 디자인 감각도 상당히 좋다. 요즘 제품들은 세팅시의 미적 감각을 중시 하는 데 비해 영국 제품들은 그런 면에서 약간 뒤떨어지지 않나 싶지만, 이 프리앰프는 초고가 제품들에 비해서도 그다지 처지지 않을 정도의 세련미를 지니고 있다. 들려주는 소리 역시 과거의 소리와는 다소 달라서 샤프하고 응답 특성이 빠르다. 투명도와 선명도 역시 어떤 제품과도 일전을 겨루어볼 만한 수준.
M250 파워앰프는 소형이지만 모노 블록으로 실효 출력이 250W이니 만만치가 않다. 지금까지 발표된 동사의 앰프 중 가장 우아하고 깨끗한 소리인데, 차분히 음장을 가라앉히는 맛이 두드러진다. 밀도감도 높고 피아노와 관악기 등의 생생한 현장감은 실황을 방불케 할 정도이다. 어떤 평론가 한 분은 '음악을 듣는데 이 이상의 제품이 필요한 것인가' 라는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CD플레이어는 이미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제라고 하면 전혀 거들떠도 안 보는 일본에서, 이미 해를 넘기고서도 베스프셀러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에이프릴의 스텔로 CDA200 SE로 구성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CD플레이어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동사의 스텔로 DA220 DA컨버터를 연결하면 더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사에서는 여기 어울릴 수 있는 트랜스포트를 개발해 내년 상반기에 발표할 예정이라고하니 매우 기다려진다.
이 시스템은 사실 필자가 들어보고 나서 구성한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여러 가지 경험과 자료를 통한 이론적인 구성이었는데, 그래서 들어보기 전에는 상당히 조마조마했다. 오디오는 결국 매칭의 예술이라고 확신을 하는데, 그것이 깨져버린다면 허사인 것이다. 그러나 제품이 세팅되어 듣는 순간 편집부의 기자도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이건 예상 외로 갑자기 몸에 시원한 샤워가 쏟아지는 느낌. 세상의 그 어떤 하이파이와도 견줄 수 있겠다라는 건 과장된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티한 점 없이 잘 청소해 놓은 새 아파트의 베란다 유리창 같은 느낌이며 놀라움이다. 대편성곡에서 그 가닥의 한올한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고, 피아노나 현의 리얼리티는 실제의 악기보다도 더 정결하고 직선적으로 파고들어 온다. 에이징이 되어갈수록 부드러움, 자연스러움이 솟아나서 성악이 감미로워진다. 이 가격대의 앙상블로서는 놀라운 발견이다.
사실 1천만원 안팎으로 얼른 매칭이 되지 않을 만큼 고가화되어 영 씁쓸하기만 한 오디오 시장에서, 이 매칭의 발견은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만약 이 시스템을 선택할 애호가는, 약간의 부드러움과 윤기 같은 것은 액세서리와 에이징으로 조절해가기 바란다. 그러면 쉽사리 다른 기기들에 눈길이 가지 않을 것이다.
이밖에 본호에 소개되는 바람에 곁치기가 될 거 같아 추천에서 제외했지만, 만약 풀레인지나 감도가 충분한 스피커가 있다면 최근에 발표된 얼티미트 사운드노블 826 파워앰프의 꽉찬 밀도감 있는 소리도 주목해볼 만하다. 출력은 8W에 불과하지만 최근작인 타노이 켄싱턴 HE나 요크민스터와도 매칭이 좋은데, 그 청량감과 소음량에서 전대역을다 끌어내는 놀라운 힘은 상당히 이색적이다. 군웅이 할거하고 있는 진공관 시장이지만 단연코'물건이라는 인상이 짙다.
또 스피커로는 역시 본지 이번호에 소개된 체스키 C-1도 인상적이었다. 대구경 우퍼를 사용하고 있는 분들은 저역에서 다소 양감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지만, 필자처럼 보통 크기의 방에서 보통의 볼륨으로 듣는 분이라면, 이 스피커의 정확성과 아름다움도 예사롭지 않다. 저 역에 탐닉하지 않는 분이라면, 이 스피커를 위에 소개한 다인오디오의 자리에 올려도 상관이 없다. 가히 고가도 아니지만 외양의 아름다움도 뛰어나다(노블 826도 마찬가지). 금년의 막바지에서 아주 인상적인 이 두 제품이 추가로 머리 속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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